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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

[차우수 칼럼] 장위공 서희, , 그의 명칭과 업적 선양은 국가가 나서야 한다

 

우리투데이 차우수 기자 |  최근 세계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국지전에 이어 한반도에도 전쟁 발발의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장위공 서희'의 외교 능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장위공  서희 집안의 이천서씨대종회측과 공동으로 기획특집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그 첫번째로 장위공 서희의 그당시 상황에 대한 고찰과 의견을 종합해봤다.

 

다음은 그 내용을 담아봤다.

 

고려 건국 초기, 성종 재위 때 993년 음력 10월에 거란 황제 성종(聖宗) 야율융서의 명을 받은 거란 장수 동경유수 소손녕은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942~998)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에 각각 임명하여 국경을 방어하게 하였다. 
  소손녕 군대는 고려 봉산군을 격파하고 고려 선봉군사 급사중 윤서안 등을 포로로 잡아갔고, 침공 이유는 “너희 나라가 국경을 침탈했으므로 내가 와서 토벌한다.” 하였고, 소손녕은 서신을 보내 “거란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귀부하지 않으면 기어이 소탕할 것이다. 속히 이르러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이 글을 보고 서희는 국왕에게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당도했으니 임금과 신하는 속히 와서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섬멸할 것이다.”라고 협박하고 또,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아 벌을 내리는 것이니,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에 고려조정은 항복론과 서경(지금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으로 나누어지자, 성종이 땅을 분할해 주자는 의견을 따르고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렸다. 이때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버리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서희는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오니, 원하옵건대 주상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손녕은 안융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진군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재촉하였다. 그리고 “마땅히 다시 대신(大臣)을 군영 앞으로 보내어 대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정회의에서 국왕은 “누가 능히 거란 군영에 가서 담판을 내어 적군을 물러가게 하겠는가?”라고 물었지만, 아무도 부응하지 않았다. 다만 서희가 나서서 “신이 비록 영민하지는 않지만, 감히 분부를 따르겠나이다.”고 하여,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고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이끌어 내었다.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거란에게 조공책봉의 명분을 주고 거란을 물러가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고려국토를 확장하여 실리를 취한 인물이 바로 장위공 서희이다. ‘장위(章威)’는 그가 57세에 서거한 후 나라에서 내린 시호로서 문신에게만 내리는 글귀이다.
  장위공 서희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포석을 마련한 국정 설계자이자 전략가로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평가하지만, 사실상 대거란 전쟁의 가장 큰 밑그림을 제시한 인물이다.
  장위공 서희는 1999년 11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장위공 서거 1,000주기 추모학술회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에 대한 많은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은 크게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외교부에서 최고 외교관으로 2009년 11월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로 선정된 바가 있다.

 

그런데, 2022년 12월 27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재임시 서울 광화문 소재 외교부 청사 내의 18층 ‘리셉션홀’의 기존 명칭을 ‘서희홀’로 바꾸고 명명식을 거행하게 하였으며, 또, 2023년 2월 2일 ‘서희홀’에 장위공 서희의 국가 표준 영정의 영인본을 봉안하게 하였다. 1,020여 년 동안 외교력이 가장 탁월하여 장위공 서희에 대한 평가가 늦은 감이 있지만,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은 공직자로서 장위공 서희에 대하여 올바른 평가를 수행하였다. 이에 이천서씨대종회 서구섭 회장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기뻐할 일이고, 우리 서씨 후손들은 너무 감격해 하고 있으며, 정부와 박진 전 외교부 장관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앞으로 장위공 서희에 대하여 국가는 두 가지 측면의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하나는 그의 장군 명칭을 변경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그의 묘소 경기도 문화재 등급을 국가급으로 상향 지정되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거란 군대를 무찔렀다고 해서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외교관이다. 무관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군대를 지휘통솔한 역사 사료가 없다.” 등으로 그의 장군 명칭을 바꾸어야 된다고 여러 논문과 교수 및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장위공 서희의 벼슬은 생존 시 ‘태보(太保)’ 정1품이고, ‘내사령(內史令)’ 종1품이었다. 고려군제에서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는데, 중앙군제 2군6위(45령, 1령 1,000명)에서 1령을 지휘 통솔하는 수장이 정4품의 장군으로, 45명의 장군이 있다는 셈이 된다. 장군 위에 종3품 대장군과 정3품 상장군이 있을 뿐이다. 종4품 품계의 장군은 그의 행적에서 맞지도 않으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장군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도 장군이라 호칭한 바 없고, 외교부에서도 문신이며 외교관이라고 정의했다. 국가 비상 사태의 ‘중군사’ 방어 임무 역할을 과연 무관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이 점은 짚고 가야 한다. 수십 년 전 과거 교과서에서의 장군 명칭이 정말 옳았던가? 이번 4월 경에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여기서 장군 명칭을 올바르게 심의하면 좋겠다. 이천서씨대종회에서 '서희 장군 묘' 명칭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번에 올바른 심의가 있기를 바란다.
  장위공 서희의 묘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희는 국민들로부터 마땅히 높이 존경되고 선양되어야 하는 인물이며,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 묘제 연구로도 국가문화재로 승격하여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장위공 서희는 목숨을 담보로 적진에 스스로 들어가 외교담판을 벌여 당시 고려 수백만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다. 나아가 여진을 내쫓아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의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고 강동 6주를 개척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압록강 국경을 긋는 역할을 한 겨레의 큰 스승인 그를 국가가 나서서 책임지고 예우하는 것이 당연한데, 힘없는 후손의 종중 단체에서 분주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는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