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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베트남 파병 전투 양민학살 허위보도 규탄 대회

베트남 양민 학살 kbs 허위 보도 규탄대회

 

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베트남 참전 파병 전우회 용사들은 KBS 양민학살 보도에 허위 보도이며 명예를 실추 하였다고 반발하여 8월 18일 오후 2시 KBS 방송국 앞에서 15.000여명이 집결하여 강력히 항의 규탄대회를 개최 하였다.

 

KBS 편파방송 규탄대회는 베트남 참전 전우회 및 한국국민통합연맹도 함께하였다.

 

베트남 참전 전우회는 KBS사장 퇴임과 방송 관계자 해임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이루어진 사건이다. 또한 한반도 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에 참전하는 경험을 한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2]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간주되며[3]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집요한 참전 의사를 밝히던 박정희 정부는 1964년 5월 9일 미국의 정식 파병 요청에 따라 1964년 9월 11일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파병하였다.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한미외교의 강화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기근과 고아의 나라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이 타국의 전쟁에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등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나라로 인식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20]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되었다.[20]

또한 월남 참전으로 M1 개런드등 재래식 병기와 군용장비에서 M16 소총 등으로 병기와 군용장비의 근대화와 개량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