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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광장의 태극기

타는 목마름의 저자 김지하

 

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광장의 태극기 앞에 타는 목마름을 헌증한다.

1975년에 발표된 타는 목마름의 저자 김지하시인, 작가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행적중에 <용서>와 <미래>를 말씀하시며, 박근혜 대통령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타는 목마름의 시인, 김지하의 정신을 부른다.<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미래다>

 

옛날 8.90년대 노선투쟁은 오히려 간결했다. 민주와 반민주, 민족과 반민족, 뭐 이런 거대담론으로 민주화세력의 춘추전국시대는 의식화라는 단계에 진입하게된다.

 

그도 그럴것이 유신정권의 몰락과 신군부의 등장 무려 12년의 장구한 시대를 관통하며 민주화세력의 내적 구성력은 참담하리만큼 그 전투력의 확대 재생산 되었고 분화 또는 체계적인 전투양상을 갖게 된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양립구도가 첨예한 과정을 거치면서 의식화의 깊이와 넓이, 강도는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민주화세력의 왜곡장이다.

그럼에도 과정의 수행자 즉 제도권에 집권을 이룩한 민주화세력의 확장과 성숙 또는 더 한층 그 가치를 시대의식의 궤도에 올려놓게 된다.

 

삼김시대의 성과이자 <바통>을 위한 성숙기였으리라. 그럼에도 비판적 지지라는 DJ 신두룸과 DJP연합의 민주정권 완성기를 돌이켜보면 <균형>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열매를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한강의 기적처럼 우리모두가 자부심을 갖게 된다.

 

노무현, MB,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윤석렬정부에 이르는 <현상>의 뚜렷한 시대의식을 돌이켜 보면 망설여 지는 두려움같은 것이 내재되고 있다.

그 무엇이 우리 모두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있을까?

그 장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민주와 반민주, 민족과 반민족,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논리투쟁을 거듭했던 민주세력의 어젠다가 정권창출의 퀘거를 역사에 단단히 올려 놓았음에도 오히려, 대한민국호의 시대의식은 더 위험해 보일까 ?

 

돌이켜 보면 경제개발 주체세력과 민주화 주체세력의 오랜 투쟁과 반복의 역사속에 정권을 창출하고 배분해 내는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금자탑을 쌓아 놓았음에도 스스로를 헐뜯고 조아리 틀어가며 적대시하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현상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제는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 중국 대 미국주의, 상식적이지도 설득력도 없는 비생산적인 화두다. <정권> 차원에서 설파하고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어두운 장막의 시대가 오늘이다.

친북세력과 반친북세력, 지나가는 강아지도 코웃음칠 궤변과 억지가 2024년 오늘에도 배설된다. 도대체 이 현상은 어디서 시작되었고 응변하였을까?

도무지 모를 일이다.

 

평화주의와 반 평화주의로 남북한 문제를 읽는 수준은 그야말로 <사상맹독>에 빠진 극단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설파하며 <친일 매국노 색출>을 선동하고 표를 모으는 어리석은 정치세력의 모습은 오히려 민주화 노정의 침을 뱉는 수치스러운 현상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고 분명한 <현상>에 대하여 논거한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을 사랑하는모임 또는 박근혜를 사랑하는모임, 노사모와 박사모의 출현과 몰락을 통하여, 돌연변이 정치 페러다임이 잉태되었다고 단언한다.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이른바 대깨문의 저널리즘시대의 현상,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개딸들이 버젓이 민주화, 민족화, 자주화세력이라는 브랜드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대가리가 깨져도,,,,개딸이라고 하여도,,,,

도대체 <작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자신의 이름 석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하물며 대의명분을 담아낸 단체, 캠페인 이름을 서슴없이 비속어로 대체하려는 <현상>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깊은 상처와 위험성을 내포한 반지성주의 팬덤의 문화가 기생하고 번성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 그 무엇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무장 시키는 중독이다. 반지성주의와 펜덤정치의 왜곡장을 지적한 많은 정치평론가들의 판단은 독이든 설탕을 먹은 반지성주의 펜덤정치의 현상을 지적한다.

 

맞아 그 때만해도 그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사랑한다>라는 선언에 함께한 민주화, 산업화세력의 의식은 건강한 페러다임으로 읽어봄이 마땅하다. 한분은 돌아가시고 한분은 탄핵과 함께 옥고를 치루는 MB 마져 춤판이 벌어지듯 세상을 온통 한편의 정의에 몰두한 나머지 <균형> 추를 상실해버린다. 그럼에도 반지성주의와 전쟁을 선포한 윤석열정권의 메시지와 캠페인이 온전히 국민품에 살아 숨쉴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오리무중의 장벽에 막혀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노선과 이념의 논쟁이 아닌 문화전쟁이자 페러독스의 징후를 명쾌하게 공유하는 연대다. 어느시대나 마녀사냥처럼 히틀러의 광기를 맞이하는 <현상>은 다르다. 대가리가 깨져도 지지하는 펜덤은 치유가 가능할까? 개딸이라 불려도 홍위병처럼 광기어린 선동을 치유할수 있을까? 사랑하던 시절이 사라진 변곡점은 없을까? 지금 우리는 노선이 아닌 <선>과 <악>의 싸움처럼 병들고 있다.

대깨문, 개딸이 무슨 일인가? 5.18기념일에 함께 부르던 <님을위한행진곡>이 소환된다. 곤고하고, 치열함으로 담아낸 민주화의 응변이었으리라. 오히려 타는 목마름을 흐느껴 부르던 민주화 열정의 모두에게 돌이켜보며 과연 우리의 선과악은 존재하는가? 라는 먼 여정이 되살아 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럼에도 <노여움>의 깃발 탄핵, 시련, 죽음, 모멸감에서 태극기를 든 그들의 <자유>는 일찍이 없었던 <시대의 응변>이다.

 

 

문화전쟁의 깃발이다. 벌써 8년여의 태극기는 초라하다. 산업화, 6.25, 월남파병에 젊음을 쏟아부은 노병이다. 사회의 어른이다. 이들의 명제는 명쾌하다.

자유대한민국 만세다. 이들에겐 경실련도 민노총도, 전교조도, 전공노도 참여연대도 특별하게 준비된 콘텐츠 공장도 없다. 조건없이 뛰어든 태극기 깃발위에 모인 눈물이요. 사랑뿐이다. 대깨문, 개딸이 보면 틀딱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느닷없이 미선양, 세월호, 이태원을 들먹이며 시체팔이를 성역화한다.

도대체 대결상대가 될수없지만 분명 그들은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버렸다.

 

과연 무엇이 우리시대의 명제가 될것인가? 그들의 타는 목마름은 이미 사라졌다. 오히려 광장의 자유대한민국 태극기 깃발 앞에 타는 목마름을 헌증한다.

 

오래전에 부르던 타는 목마름, 님을위한 행진곡의 <주인>이 사라지고 오히려 광장에서 눈물, 열정, 그리움을 목놓아 부르는 그들을 위한 곡조로 변하였다. 8년여의 자유대한민국 태극기 광장의 타는 목마름이다.

 

 

자유대한민국 타는 목마름

신새벽 목마름으로

신새벽 광장에

네 이름을 쓴다. 자유대한민국

내 머리는 너무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쓴다 자유대한민국

 

아직 동트지 않은 광장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 소리 문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동지들의 뜨거운 열정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광장에 백묵으로 서튼 솜씨로 쓴다.

 

숨 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대한민국이여 만세

1975년 발표된 시 <타는 목마름>

김지하 시인은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에 찬사를 보냄.

 

다시, <사랑한다>는 대한민국을, 치유를 위하여, (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