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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복의 정의

한복의 원형과 복식문화사적 이해

 

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박현주 사단법인 한복진흥원 원장님 자료 에서- 

한복은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활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전통적으로 입어 온 고유의 옷을 말한다.

몽골계 인종 및 우랄알타이어계로 분류되는 한국인은 의, 식, 주를 포함한 생활 전반에 걸쳐 북방계 유목민족의 생활양식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가운데 [의]에 해당되는 한복은 한반도의 지형적, 풍토적 특색의 영향을 받아 생활의 방편으로 변화되어 독특한 생활문화의 일부로 정착되어져 왔다. 이를 전통복, 민속복 혹은 민족복으로 명명하여 현재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복의 원형은 스키타이 북방계열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저고리), 고(바지)의 기본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고리와 치마를 주로 입는 중국의 농경사회 복식형태보다 저고리와 바지의 구조가 발달된 서역계 유목민의 복식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북방기마유목민의 기본 복식 구조로 추위와 유목생활에 적합하도록 발달되었다. 저고리는 남녀 구분이 없이 소매통이 좁고 길이가 긴저고리를 허리까지 내리고, 통이 좁거나 넓은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허리끈이나 가죽끈으로 옷깃을 여미고, 머리에는 절풍모나 두건을 쓰고, 말을 타고 달리기에 편리한 화(목화)라고 불리는 목이 긴 신발을 신었다. 이러한 복식 형태는 수차례의 외세의 침입으로 새로운 복식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 기본구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국가체제가 확립되는 삼국시대부터는 신분제도가 확립되면서 지배계층의 복식문화와 피지배계층의 복식이 구별되었다.

지배계층의 복식은 권력과세를 과시하기 위해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게 발달되어 갔고, 반면 피지배 계층의 복식은 우리민족 고유의 복식형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농경사회로 생활 문화가 변해가면서 한복도 이전 시대와는 달리 저고리의 소매통이 넓어지고, 남녀를 불문하고 예를 갖추어야 하는 장소에서는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게 되고, 저고리 위에도 (포)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형태의 겉옷들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의 면모가 갖추어 지면서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빈번한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생활, 사회, 문화 전반이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한 복합문화로 발전되어 갔다. 한국인의 복식문화에 대한 뛰어난 감각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가야, 백제 ,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장신구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한국복식사를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 및 문화사 전반에 가장 취약한 시기가 고려시대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흥망성쇠가 반복되면서 이들과 빈번한 외교적 접촉을 많이 해 온 신라의 문화를 가장 많이 이어받은 고려가 중국의 직, 간접적인 내정 간섭으로 인해 인위적 외래문화의 흡수가 사회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의, 식, 주 모든 분야에 중국풍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100년간에 걸친 두 차례의 몽고침략으로 몽고의 공주국이 되어버린 고려에는 몽고의 공주들이 시집오면서 장만해 오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간에도 차츰 흡수되어 갔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원삼이나, 족두리, 몽두리, 배자, 철릭과 같은 옷이나 장신구들이 당시 몽고에서 전해진 것들이다. 이렇게 몽고복속기가 진행되면서 몽고식 변발에 몽고식의 방령, 요선철릭(당시 관료들의 관복으로 잦은 전시행정에 대비하기 위해 착용한 전투복)과 같은 복식을 착용하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가 망하자 명나라의 복식 제도를 다시 받아들였고, 우왕 13년 (1387년)에는 호복제였던 관리들의 복식을 명나라 제도로 바꿨는데 이때 관복이 사모와 단령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 관리의 관복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 여인들의 복식을 보면 긴 주름치마에 저고리의 길이는 전 시대에 비해 짧아졌고, 소매는 좁아져 길게 늘어지게 입었다. 그 위에 배당을 입고 “표”라는 긴 숄을 어깨에 늘어뜨려 사치와 신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정하고 주자학과 성리학에 기초한 국가체제를 갖췄기 때문에 스스로 중국에 신하국으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해서 나라의 국왕이 책봉되면 반드시 명나라의 재가를 받았다. 복식제도 또한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받아들였으나 이는 대부분의 지배계층의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 민간의 복식은 우리민족 고유의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았다. 중기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으로 우리민족의 생활문화에 국속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게 되고, 이전에 비해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구조로 바뀌어 나갔다.

저고리의 소매는 더욱 좁아지게 되고, 갑옷보다는 간편한 군복의 형태인 전복이 일상화되고, 대창의에 퀘자 대신에 선비들은 도포 하나만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양대난을 치루고 국가와 사회가 안정되어가면서 제2의 문예부흥기며 태평성시였던 영, 정조 시대에는 복식 및 장신구의 사치가 극심해지고 민간의 사치 풍조가 만연하여 복식과 이에 따른 제도에 대한 규제가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영조는 민생안정을 돌보기 위해 잠행을 자주하였는데 주로 소색의 명주로 만든 도포를 착용했다고 한다. (사치규제에 대한 솔선수범의 차원에서) 특히 이 시기에 여성의 가체(가발)에 의한 사치가 극에 달해 혼례식 날 신부가 가체 무게 때문에 목이 부러졌다고 하여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쳐 국가적으로 가체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혼인을 앞둔 처녀들의 머리체가 많으면 집안에 복이 굴러들어온다고 하여 머리체가 적은 처녀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 가체마련에 혼수비용을 많이 들이게 되는 등 사대부가나 기생에 이르기까지 사치가 사회문제화되기도 했다.

후기에 내려오면서 여성의 저고리 길이는 더욱 짧아지고 미적균형을 위해 치마는 더욱 풍성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복의 형태를 말하는 하후상박(풍성한 치마에 짧은 저고리)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호복제로 관복을 채택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오랑케 나라로 비하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대명회전]에 의한 명나라 제도를 계속 따랐다.

이렇게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명나라의 복식과 이전의 고려시대 몽고풍의 복식과 민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리민족 고유의 복식과 새롭게 생겨난 여러 종류의 남자복식, 여자들의 예복, 친의류 등이 어우러지면서 우리민족 고유의 복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복의 기본 구조가 생겨나게 된 것은 한국적인 질서에 기인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자연적인 질서와 정신적인 질서와 사회적인 질서가 복합적으로 융합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개화기 이후 양복과 양장이 생활복식화 되어가는 과정에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지혜를 가진 민족이 만들어 낸 우리옷이 [한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