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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지방선거 출마자 인터뷰] 김경한, "국회보좌관에서 이제는 행정가로"

 

 

국회 보좌관을 통한 경험을 살려 이제는 '행정가'로 변신하고자 하는 '젊은 보수주의자'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실(비례대표) 김경한 비서관을 만났다.

경기도 김포시에서 내년 김포시장을 꿈꾸는 그의 살아온 삶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Q. 간략하게 본인을 소개한다면? 

A. 반갑습니다. 저는 현재 국회 정경희 의원실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경한 이라고 합니다. 국민의힘 경기도당 정책기획특보, 김포시(갑) 당협위원회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1978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36보병사단과 특전사 제9공수여단에서 군복무 했습니다. 대위로 전역한 이후 제17~21대 국회에서 보좌관과 비서관으로 근무하며 예결위, 교육위, 국방위, 행안위, 정무위 등의 상임위원회 업무를 보좌했습니다. 당대표, 원내부대표, 원내대변인, 당내 특위 위원장 등 당직 업무를 다룬 경험도 있습니다.

지난 제20대 총선에서는 김포시(을) 홍철호 후보 선거캠프 전략기획실에서, 제21대 총선에서는 김포시(갑) 박진호 후보 선거캠프에서 전략실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그 외에도 대선, 총선, 지방선거, 전당대회 등 다수의 선거에서 역할을 맡았습니다. 

국회에서 뿐 아니라 모바일서비스 회사인 BNS Works 사에서 기획팀장으로 근무했고, (사)한국게임산업협회 정책팀장으로도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5년 결혼 후 2명의 딸과 함께 김포 풍무동에 거주 중입니다. 아내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 딸은 관내 유치원과 유현초등학교를 거쳐 풍무중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제19·20대 국회에서 홍철호 전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며 국회 국방위원회와 행정안전위원회 정책현안 및 한강하구 철책문제, 대포일반산업단지 조성 등 김포시 현안업무를 처리했습니다. 

 


Q. 본인의 사상이나 견해는 어떤가요?

A. 저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정만을 추구하기보다 도전적이고 개혁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는 가장 먼저 '법'은 개인이 가진 저마다의 자유를 보장하고 극대화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봅니다.

또한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때 법의 존재 목적이 달성되며 법치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권리에는 항상 의무가 따르며, 의무를 이행할 때 그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되며,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국가·사회·가정 등 공동체의 존립과 발전에 헌신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감사가 따라야 하며, 오늘의 번영은 선배세대의 헌신에 기반한 것임을 기억하고, 우리를 뒤따르는 미래세대가 더 나은 삶을 가꿀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대, 지역, 성별, 학력, 경제적능력 등의 구분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보완, 공동체의 문제해결을 위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는데에서 더 나아가 확장되어야 하며 제한된 기회를 한정해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발굴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경쟁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므로 공정한 규칙을 세우고 따르며 그 결과를 인정하여 승자에겐 축하를, 패자에겐 위로와 재도전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과 인류의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이므로 개인이 땀흘려 이룩한 성과를 국가와 사회는 존중하고 장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질서를 존중하고 지켜나가야 하며, 국가는 개인의 노력에 기반한 경제적 자립을 뒷받침하되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필수적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에게 부여된 납세와 병역의 의무는 징벌이 아닌,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신성한 의무이므로 성실한 의무이행자는 그에 합당하게 존경받고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국익을 중심으로 한 실리적 관점에서 외교안보정책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며, 납북자 문제 해결과 북한주민의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일논의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공동체의 존립과 지속가능한 발전, 자유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특정 이익집단 또는 사상집단에 의해 국가가 휘둘리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선출된 사람들은 국민으로부터 잠시 권한을 위임받은 봉사자이며,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유권자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Q. 성장과정이 궁금합니다.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A. 저는 1978년 7월 17일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서 3남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학창시절은 대구에서 보냈고, 대구 성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불교 종립학교인 능인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모태신앙을 물려 받았습니다.

어린시절 부모님이 대구 수성구에 정착하면서 ‘수성11학군’으로 불리는 제법 괜찮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했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고추방앗간을 경영했던 관계로 손님이 많아 바쁠 때나 영업준비를 하는데 있어 가게 일을 도울 때가 많았습니다. 

학업은 주로 혼자서 해결했는데, 보습학원 보다는 피아노, 태권도, 컴퓨터 등 주로 예체능과 신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녔습니다. 어린시절 축구를 좋아해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대학진학을 고민할 때는 우선 공군사관학교를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앓아오던 알러지성 비염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판단, 육군사관학교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관학교를 목표로 한 이유는 집안의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최대한 빨리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3형제이다 보니 부모님 입장에서 볼 때 세 아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부담이 적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독립심이 강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Q.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데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생도생활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생도생활 4년은 알차고 역동적으로 보냈습니다. 1학년 시절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었지만 육사 교육시스템 자체가 1학년을 완벽한 팔로십 체화 시기로 삼기 때문에 필요한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2학년 말에는 축구선수 생도로 강제로 발탁됐는데, 포지션까지 골키퍼로 강제배치됐습니다. 알고보니 체육교수님 한 분이 ‘아 그 친구가 있었지’하면서 선발부터 포지션까지 직접 지정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육해공군 사관학교끼리 맞붙는 ‘삼사체전’이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저는 시합 준비 중 쇄골에 실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중도 하차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응원만 열심히 했습니다.

3학년 때는 자치지휘근무 행정보좌관 생도를 맡아 근무했는데 인사와 군기를 담당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1학년과 2학년 앞에서 엄격한 척 무게를 많이 잡았습니다. 당시 내무검열 우수, 체육대회 우승 등 최우수 중대(화랑중대) 선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는데 덕분에 조직운영과 행정업무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4학년 때는 육군사관학교의 훈육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을 정리해 공론화 시킨적이 있었습니다. 인쇄나 자필로 쓴 대자보까진 아니었지만 2,3,4학년 학년별 전자게시판과 훈육요원들에게 교육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제도개선 의견을 메일로 보냈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강하고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바람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1급 사고’라는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징계심의 과정에서 저를 아끼는 훈육관님들이 마음고생 하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스럽습니다. 그분들의 노력 덕에 정상참작 요소를 인정받아 퇴교는 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가 기말고사 시험기간 이었는데, 개인적인 반발심리로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해 버린 일까지 겹쳐 휴가(방학)도 통제되고, 졸업 전 진행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서도 빠졌습니다. 그 후 한국을 방문한 호주 사관생도들에게 디지털앨범을 만들어 준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Q. 장교로 임관한 이후에도 다양한 임무를 맡으신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게 있나요?

A.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제36보병사단에서 소대장과 인사장교, 동원장교로 근무했고 소대장 때는 대대 특공무술 시범 지휘장교로 임무를 수행하며 강원도 원주 일대의 각종 행사와 기념식에 투입됐습니다. 

인사장교와 동원장교 시절에는 규정과 원칙을 고집하는 업무스타일 때문에 때로 마찰도 있었지만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인사장교로 근무할 때, 소속대대가 신병선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상급부대 신병교육대가 우수한 병사를 먼저 뽑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병교육대를 불시에 찾아가 모든 신병들의 신상기록을 확인하고 우수한 인력을 먼저 뽑아가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일로 신병교육대 간부들과 크게 다툰 일이 있었는데, 정작 인사장교 임기가 만료되자 신병교육대 대장이 저를 직접 찾아와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다퉜던 신교대 간부들에게는 음료수 한통을 들고 찾아가 오해를 풀기도 했습니다. 신교대장의 제안이 있었지만 상급부대에서 내려온 인사명령서에는 신교대가 아닌 대관령 산꼭대기에 있는 부대가 적혀 있었습니다. 저를 두고 여러 지휘관이 다투다 보니 보직담당 장교가 아예 다른 곳으로 저를 보냈다고 합니다.

새로운 부대에서는 병사 상호간 구타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징계위원회를 열어 심문하고 ‘영창 7일’의 처분을 의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상급부대장인 연대장이 결재문서에 ‘영창 15일’이라고 크게 쓰고는 문서를 반려시켰습니다. 

연대장 지시에 따라 연대 참모는 저에게 ‘영창 15일’로 공문을 다시 올리라고 전달했지만, 저는 ‘사단내규 상 상급부대장은 징계 감경권만 있다’라고 버텼습니다. 결국 사단 헌병대까지 가서 사단내규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연대장에게 ‘영창 7일’이라는 결재서류를 올리고 결재를 받았습니다. 

새파란 초급장교가 연대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단내규와 징계위원회의 심의 결과를 지켜낸 것인데,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 연대장도 설명을 듣고는 바로 이해하고 결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입창시기가 좀 지연되긴 했지만, 규정에 명시된 원칙을 지킨 덕에 부대 내 다른 간부들로부터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중대장 교육을 수료하고, 특전사 제9공수여단에서 팀장(중대장)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특전사에서는 며칠 또는 몇 주간 산속에서 숙영하는 훈련이 많았는데 나름 적성에 맞아 즐겁게 근무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천리행군 출발 직전 아내로부터 임신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열흘 남짓한 천리행군 훈련은 크게 힘든 줄 모르고 마쳤습니다. 팀장 임무는 인명사고나 낙오자 없이 무사히 마쳤고, 전역 직전 대대장으로부터 ‘팀원간 결속력이 가장 강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Q. 육사 출신인데 대위로 전역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유를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전역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5년에 한번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을 뿐 아니라, 군 내에서의 진출보다는 사회에서의 진출에 더 큰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은 국가 경제적으로 좋은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을 왜 버리려 하느냐’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께 “아버지, 아버지는 3형제를 키우시느라 내일 뭘 먹나, 뭘 입나, 어디서 자나 하는 문제를 평생 고민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런 고민은 아버지께서 충분히 해 주셨기 때문에, 아들인 저는 조금 더 나은 고민을 하면서 살 의무가 있습니다.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라며 설득했습니다.

 


 

Q. 아내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A. 전역 직전 결혼했는데, 아내는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나온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보고는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권했고, 사귄지 1년 만에 결혼했습니다. 나이차가 5살이나 나는 데다 아내는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를 휴학으로 남겨놓은 채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도둑놈이라는 핀잔을 많이 들었습니다. 올해 16년차인 결혼생활 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가정을 꾸리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극복해 오고 있습니다. 


Q. 육사 졸업 후 장교로 군복무하고, 전역이후 국회 보좌직원으로 새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국회에서의 생활을 간단히 말씀해 주신다면?

A. 2006년 전역한 이후 같은 해 국회 인턴비서로 보좌직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육군대위 출신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당시 월급 100만원의 인턴비서 생활을 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준 의원과 인간적으로 이끌어준 보좌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근무했습니다.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덕에 7개월의 인턴비서 생활 이후 타 의원실 7급 비서로 정식 직급을 받았습니다. 정식으로 근무한 것은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 의원실이었는데,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5급 비서관까지 승진했습니다.

이후 제17, 18, 19, 20, 21대 국회에 거쳐 보좌관과 비서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상임위는 국방위원회를 비롯해 행정안전위원회, 교육위원회, 정무위원회 업무를 보좌했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계수조정 소위원회 업무도 보좌했습니다. 

보좌직원의 업무성과는 대부분 국회의원에 귀속되고 비공개로 두어야 하는 일도 많았지만 나름 보람을 느끼며 일했습니다. 장관, 도지사, 기업가, 정당인, 교수출신 등 다양한 리더십을 경험하며 당대표, 원내부대표, 원내대변인, 당 특위 위원장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업무도 보좌했습니다.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 전당대회 등 주요선거도 수차례 치렀고 보좌직원으로 근무하며 2종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Q. 김포와의 인연은? 그리고 김포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A. 김포에 정착해 생활하면서 지역구 국회의원인 홍철호 의원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김포시민의 숙원인 한강하구 철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용산 국방부 내 합참청사를 홀로 방문했던 일입니다. 합참 작전1처장과 마주앉아 1:1로 철책개방을 논의했는데, 논의내용은 실시간으로 작전본부장과 합참의장, 국방부장관과 조율되었습니다. 

충분한 준비와 논의를 바탕으로 협상은 합의에 이르렀고, 관련내용은 2015년 12월 국회 국방위원회 '한강하구철책제거 소위원회'에도 상정되어 이견없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낮 시간 개방 승인에 따라 김포시의 수변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어야 하는데 당시 김포시 차원에서는 추진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또, 양촌읍 대포일반산업단지 조성 당시 군부대가 ‘부동의’의견을 제출하는 바람에 사업추진이 난관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산업단지 조성은 김포의 경제와 일자리에도 중요한 사업이니 만큼 국방부의 입장 때문에 좌초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관계법령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국방부의 반대입장은 법적근거가 미비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와 합참, 17사단을 설득해 반대공문을 취소하게 만들었고, 이후 산업단지 조성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홍철호 의원실에서의 근무 뿐 아니라 김포와 관련해서는 제21대 총선에서 김포시(갑)에 출마한 박진호 후보의 선거캠프를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젊은 청년정치인의 고군분투를 지켜봐 왔기 때문에 그의 요청에 캠프에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캠프 초기구성부터 시작했습니다. 

정책과 조직, 메시지와 홍보 등 선거전반을 정성껏 챙기며 후회없이 선거를 치렀습니다. 후보자와 선거캠프 운영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선거결과는 낙선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덕에 끝까지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은?

A. 저는 홍철호 의원실과 박진호 후보 선거캠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포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정치인으로서의 성장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두분의 당협위원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대한민국과 김포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포시장에 출마하고자 준비하고 있는 만큼 많은 분들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겸손한 자세로 노력하고,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력

대구 성동초등학교 졸업
대구 능인중학교 졸업
대구 능인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토목공학사)


■ 주요약력

제36보병사단 기동대대 소대장
제36보병사단 기동대대 인사장교
제36보병사단 109연대 1대대 동원장교
제9공수특전여단 52대대 중대장
BNS Works(모바일 서비스) 기획팀장
(사)한국게임산업협회 정책팀장
제17·18·19·20·21대 국회 국회의원 보좌관·비서관
- 김명자 전)환경부장관
- 조성태 전)국방부장관
- 심대평 전)충남도지사
- 김 정 전)한국열린교육학부모회 수석공동대표
- 강은희 현)대구교육감
- 홍철호 전)국회의원, ㈜크레치코 회장
- 김성원 현)국회의원(동두천·연천)
- 정경희 현)국회의원(비례대표)


■ 저서

· '성냥팔이소녀 성공기'(2018, 한국경제신문i) : 청소년 경제경영 동화
· '비유는 나의 힘'(2014, 지식과 감성) : 리더를 위한 메시지 비법